Lassitude
멜리사 크롬비츠 본문
멜리사 크롬비츠는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폭풍우 치던 여름날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신발이 찔걱거렸다. 가방에 넣어 뒀던 옷도 다 젖어버려서 갈아입을 것도 없었다. 우산이 망가진 탓이었다. 비를 피하려고 들어온 가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찻집에서 몸을 데울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겨우 좁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지만, 그조차도 바람 때문에 안전하지 못했다.
이런 최악의 여행은 오랜만이었다. 멜리사는 빗방울이 돌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며, 두고 온 것들을 생각했다. 급작스러운 여행 소식에 놀랐을 친구들의 얼굴이 생생했다. 이 모습을 봤으면, 분명 그랬겠지. 그렇게 급하게 떠나야 했냐고. 꼭 지금이어야 했냐고. 그리고 갈 거면 준비라도 잘하고 가지 그랬냐고.
언제나 그랬다. 멜리사 주변에는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좋아하니까, 걱정하고, 걱정하니까 곁에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멜리사는 움직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때가 생겼다. 그때가 되면 좋아하는 사람들을 뒤로해야 했다. 험난한 길이라도 괜찮았다.
그저 가야 하는 때가 오면, 움직였다.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치고, 옷이 젖어도 상관없었다.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 비는 그치고, 옷은 마른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여전히 처마 밖은 비가 거세졌는데, 멜리사의 위로는 비가 약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유를 발견한 것은 금방이었다. 곤란한 얼굴의 남자가 멜리사를 내려보고 있던 탓이었다.
키가 크고, 조금 창백하게 생긴 남자였다. 솔직히 꽤 잘 생겼다. 멜리사가 만난 사람 중에 최고는 아니었지만, 양손에 꼽을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었다.
“…주시는 건가요?”
남자는 멀찍이서 손을 뻗어, 멜리사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워주고 있었다. 남자는 우산을 두 개나 들고 있었는데, 하나만 펼쳐 멜리사의 위에 씌워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남자 쪽으로는 물이 튀겼다.
“…필요해 보이시길래.”
어쩐지 어정쩡한 자세를 보니, 멜리사에게 우산을 건넸다가 받지 않아서 계속 들고 있었나 보다. 멜리사는 그 모습이 조금 웃겼다. 불렀으면 혼자 비를 맞지 않아도 됐을 텐데. 멜리사는 우산을 받으며 감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지금 같은 순간에는 꼭 필요한 물건이네요.”
멜리사의 인사에 남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부르셨으면, 빨리 받았을 텐데. 오래 기다리셨어요?”
멜리사는 장난처럼 웃었다. 별로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생각하시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남자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별말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담담하게 인사를 하고, 제 우산을 펼쳤다. 그 우산은 멜리사에게 건넨 것보다 작은 우산이었다. 몸만 간신히 들어갈 크기였다. 아마 멜리사에게 가방이 있는 걸 보고 큰 걸 내어준 것 같았다.
“잠시만요.”
멜리사가 남자의 옷자락을 잡았다.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양손이 아니고, 한 손에 꼽을 정도는 되겠는데. 멜리사는 활짝 웃는 얼굴로 남자에게 제안했다.
“고마워서 그러는데, 차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어요.”
비 오는 날, 비를 맞으며 멜리사를 기다려 준 사람이니까, 차 한잔 할 시간은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이 정도는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제안이라고, 멜리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멜리사는 남자의 차분한 거절에 민망해하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는 그 정도 친절이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대신 멜리사는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럼 차를 먼저 마시고, 대단한 일을 나중에 해 주시면 안 될까요?”
“?”
남자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멜리사를 보고 있었다. 멜리사는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차 한 잔 마시고, 짐을 숙소까지 옮기는 걸 도와주시는 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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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엄마를 처음 봤을 때 어땠어?”
꼬마 캣시는 오독오독 쿠키를 씹으며 물었다. 한 손에는 엄마가 선물한 그림책이 넘기고 있었다.
“멜은…특별한 사람이었단다. ”
옆에 앉아있던 백작이 똑같이 오독오독거리며 답했다. 백작의 손에는 멜리사가 선물이라며 들고 온 여행계획서가 있었다. 계획서가 있는 여행이란, 대부분 해외로 나가는 것을 뜻했다. 국내로 가는 여행은 계획이 아예 없으니까.
“어떻게 특별했는데?”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돌바닥을 보며 계속 웃고 있던 점이 그랬지.”
백작이 계획서를 한 장 넘겼다. 이번 여행지는 산이군. 산이라면 제국에도 넘치도록 많지만, 백작은 멜리사를 잘 알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너머를 볼 줄 알았다.
“엄마답네.”
꼬마 캣시가 그림책을 한 장 넘기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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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빠를 처음 보고 어땠어?”
“어머? 우리 귀염둥이, 그게 궁금해? 아빠는, 음. 대단히 친절하고, 신사적이었단다. 잘생긴 것도 물론이고. 비가 내린 땅에는 무지개가 내려오잖니? 달링이 꼭 그랬단다. 처음 만나고 나서 바로 데이트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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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짧게 썼던 부분인데, 스토렘 부부의 첫만남입니다.
부부 외전을 고민하면서, 스토리를 따로 만들었는데, 너무 길어져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