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situde

특별 외전 (6) 본문

1 내 친구의 부도덕성에 관하여/외전

특별 외전 (6)

RS_L _ 2019. 10. 11.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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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외진 회랑에는 아카데미를 빛낸 인물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대 총장들의 초상화가 그려진 회랑은 일반 학생들은 잘 다니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배움의 길을 걷는 자들은, 응당 학문의 발전을 이뤄낸 선배에게 옅은 분노를 가지기 마련이다. 

루카스는 이곳에서 카티올을 찾는 중이었다. 지금쯤이면 어디 꼬꾸라져서 졸고 있을 시간인데. 이 근처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는데. 카티올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야!” 

불쾌함의 근본이 저거였나. 키이스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루카스의 앞까지 달려왔다. 키이스는 사납게 검지 손가락을 찔렀다. 

“듣지도 않는 과목 과제를 니가 왜 챙겨가? 이 미친놈이.”
내지른 손가락은 루카스의 목젖 앞까지 나왔다. 루카스가 저 손가락을 분지를까 싶다가, 키이스의 살에 손끝이라도 닿는 게 싫어서 관뒀다.

“내가 챙기는 게 싫으면, 니가 챙겼어야지.”

“내가 챙기려고 했는데, 니가 훔친 거잖아! 빨리 내놔! 카티올이 그린 그림 어딨어? 빨리 안 내놔? 이 시커먼 도둑놈이 진짜!”
키이스가 발을 구르며, 루카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루카스가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떨궈냈다. 

“내놓으라고! 내 그림!”

“그게 왜 니 그림이야.”

루카스가 기가 막힌 얼굴로 대꾸했다. 키이스는 그 괴상망측한 검은 뿔 괴생물체에 대한 지분이 1%도 없었다. 오히려 모델이 되어준 루카스라면 모를까. 

“내가 그리게 만들었잖아, 그럼 내가 주인이지!”
키이스가 고함쳤다. 고요한 복도에 키이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주변에 사람이 없었으니 소리를 지른 거겠지만. 

“내 손에 들어왔으면 내 거지.”

“미친놈이, 그게 왜 니 거야? 내 거라니까! 내가 한 달도 전부터 침 발랐거든.”

“더러워.”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키이스의 천박한 말투야 한 두번 듣는 게 아니지만 더러운 건 더럽다. 

“더러워? 넌 그 더러운 걸 가지고 튄 더 드러운 놈이거든. 이 야비한 도둑놈이 지금 누구보고 더럽다야?”

“한 달 전부터 도둑질을 생각하고 있던 도둑고양이가 할 말은 아니지.”

“뭐래, 내가 왜 고양이야? 그럼 넌 미꾸라지다. 이 미꾸라지 같은 미친놈이, 어디 숨겼어!”
키이스가 이를 까득 물고는, 루카스의 등으로 뛰어들었다. 루카스가 기겁하고 피하려고 했지만, 거머리 같은 키이스를 완전히 뜯어낼 수는 없었다. 

키이스는 장대 같은 루카스의 등에 매달려, 무자비하게 루카스의 가슴을 더듬었다. 

“이 정신 나간 망아지가!”
그렇게 되니, 루카스도 제대로 짜증이 났다. 루카스는 질척이는 키이스를 힘으로 밀었다. 키이스는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버텼다. 기사 학부의 다른 놈들도 이렇게 끈질기지는 않다. 

루카스도 키이스의 긴 머리카락을 붙잡아서, 뒤로 당겼다. 키이스는 머리카락이 뽑히는 압력만큼 루카스의 머리채를 뜯었다. 붙으려는 자도 떼어내려는 자도 보통 성질은 아니었으니, 쉽게 끝나지 않았다.

키이스는 루카스의 머리채를 잡아 뜯는 와중에도 열심히 루카스가 숨겼을 캣시의 과제를 찾았다. 

“이거구나!”

키이스는 루카스의 조끼 주머니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키이스는 루카스의 겉옷을 억지로 벗겨버리고, 의심스러운 도화지를 꺼냈다. 키이스는 기적의 괴력으로 종이를 잡아당겼다. 차마 종이가 찢어질까 루카스가 몸을 사리는 사이, 키이스가 도화지의 일부를 확인했다. 

“이런 망작은 캣시밖에 못 그리지!”

부분을 보고도 전체를 알아낸 키이스는 이 그림이 캣시의 작품임을 확신했다. 캣시가 들었으면 꽤나 섭섭할 말이었다. 루카스가 다시 그림을 빼앗으려고 하는 순간, 키이스가 앞니로 종이를 물었다. 물었다? 루카스가 눈썹이 올라갔다. 

“?”

사람을 무는 건 짐승이라 그렇다 했지만, 종이도 물어? 루카스는 어이가 없는 눈길로 키이스를 쳐다봤다. 키이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는 도화지를 당겨 입에 전부 구겨 넣었다. 

키이스가 아카데미의 수재로 불리기는 하였으나, 도화지를 씹어먹는 능력도 있는지 몰랐던 루카스였다. 저게 진짜 제정신이 아니긴 하구나. 루카스가 질린 눈빛으로 키이스를 내던졌다. 닿고 있는 것만으로도 멍청함이 옮을 것 같아서였다. 

키이스는 데굴데굴 구르는 가 싶더니, 재빨리 균형을 잡아 일어섰다. 종이를 무쇠처럼 씹어먹은 키이스는 오만한 얼굴로 루카스를 비웃었다. 

“이제 걔는 졸업 못 해.”

루카스는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걔는 그거 냈어도 졸업 못 해. 이 앞뒤 분간 못하는 짐승아. 



그리고, 우연히 캣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종이도 먹는 게 정말 짐승이 따로 없네.  

캣시는 우연히, 정말 우연히 요정들을 발견했다. 강의가 비는 시간이라 낮잠을 자러 가던 중에 우연하게도 요정들의 난투를 보게 ㄱ되었다. 처음에는 둘이 붙어서 대단한 밀회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몸으로 아주 격렬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점잖아졌나 싶던 요정들이었는데. 역시 그런 일은 없구나 싶었다. 

둘이서 상대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쯤부터는 할 말을 잃었다. 저러다가 아카데미의 자랑, 두 요정의 머리에 땜빵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땜빵이 생기면,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수도에도 소문이 퍼질걸. 어휴. 그건 좀 싫겠다. 

아카데미의 뛰어난 인재로 추앙받는다고 해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여간 어릴 때보다 더해. 캣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고 둘을 말릴 마음도, 자신도 없었기에 캣시는 어디까지 가나 보겠다는 심정으로 둘을 구경했다. 머리카락을 놓으면 금방 끝날 몸싸움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절정은 역시 키이스가 종이 같은 걸 우적우적 입으로 넣을 때였다. 키이스는 대체 뭘 먹고 있는 거야. 키이스가 미식에 뜻이 있는 건 알았지만, 괴식(怪食)을 즐기는 줄은 몰랐다. 

둘은 어쩌다가 저렇게 바닥을 뒹굴고, 키이스가 왜 루카스의 주머니에서 나온 종이 같은 걸 주워 먹는 걸까. 아카데미는 식사도 질이 좋은데. 혹시 종이가 먹고 싶은 거라면, 꼬질꼬질한 걸 주워 먹지 말고 깨끗한 걸 먹는 게 더 좋을 텐데. 

궁금하기는 했지만, 깊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염소가 된 요정과 어울리고 싶어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적어도 캣시는 아니었다.

키이스가 오만한 얼굴로 종이를 삼키는 걸 확인한 캣시는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기분이 안 좋은 둘에게 발견되었다가, 시끄러워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정이 무서워서 피하나, 귀찮아서 피하는 거지. 캣시는 고개를 젓고, 살금살금 요정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둘의 싸움의 원인이 괴상망측 뿔 달린 검은 괴물 그림이라고는, 캣시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악마를 그리고, 짐승을 탄생시킨 캣시는 평온한 얼굴로 낮잠터를 찾아 떠났다.  


***

졸업식의 여부를 결정할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었다. 

“…A+?”

캣시는 성적표를 받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성적표를 받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조용한 곳으로 나왔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교수가 키이스를 보고 눈이 멀었다고 하더니, 정말 눈이 멀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A+가 나올 수 없는 결과물이었는데. 

혼란에 빠진 캣시를 키이스가 불렀다. 

“캣시. 얼굴이 왜 그래?”
키이스는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꼭 성적 불충분으로 졸업이 미뤄진 사람 같네.”
키이스가 뭐라고 하든 캣시는 고민했다. 성적에 항의해서 교수님에게 따지러 가는 학생은 본 적이 있다. 캣시 옆에서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 누군가가 그랬다. 키이스는 알파가 붙지 않는 점수를 용납하지 못해서 자주 갔다. 

그런데 성적이 너무 좋아서 항의하기도 하나? 

어쩌면 이 점수가 정당한 점수일 수도 있지. 그림을 그린 당사자가 이야기하기에 부끄러운 말이지만, 캣시가 그린 그림은 한번 보면 잊혀질 스타일이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점수가 좋으니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그림 스타일이 먹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역시 전문가는 좀 다른 건가? 

“왜 그렇게 심각해? 나랑 같이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 되잖아.”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성적표를 가져갔다. 그리고 안색이 변했다.

“이게 뭐야?”
나도 그게 뭔지 모르겠거든. 키이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 교수, 미친 거 아냐?!”
그렇게 말한 키이스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키이스를 보며 캣시는 생각했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한 예술 감각이 내게 있었던 건가? 교수님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재능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가능성에 캣시는 한참을 혼자 고민했다.


***

캣시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루카스는 기사학부 훈련장에서 혼자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성적 발표가 낫겠군. 캣시는 무사히 졸업을 하겠고, 키이스만 약이 올라 죽겠지. 

루카스는 혹시나 싶어서 자신의 초상화를 준비했었다. 정 안되면 바꿔치기라도 해야겠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루카스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초상화를 한 장 그렸다.

문제가 있다면, 루카스의 그림이 초심자답지 않게 너무 잘 그렸다는 점이었다. 눈에 띄는 그림이 될 게 뻔해서, 몇 번이고 수정을 했었다. 캣시가 갑자기 눈에 띄는 건 바라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루카스는 심혈을 다해 수준을 낮춘 그림을 보고, 잘해도 B 정도를 받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형편없는 그림이었으니까. 만년 수석의 기준 잣대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루카스 본인은 몰랐다. 그게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지도. 

그날 저녁, 초상화 모델을 해 줘서 고맙다며 식사에 초청받은 루카스는 귀를 의심했다. 

“나 재능이 있는 건 지도 모르겠어.”

“뭐?”
캣시는 담담한 얼굴로 멍청한 소리를 했다. 

“그림 말이야.”
그림에 재능은 무슨, 종이를 씹어먹던 키이스도 이렇게 어이없지는 않았다. 캣시는 말간 얼굴로 말했다.

“초상화, 다시 그려서 하나 줄까?”
루카스는 그 악마 같은 그림이 어떻게 다시 그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끔찍한 걸 왜…? 캣시의 그림 훔쳐봤다고 말할 수 없던 루카스는 잠시 침묵했다. 

“방울토마토나 먹어.”
캣시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루카스의 최선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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