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situde
특별 외전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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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올, 미학 과제 끝냈어?”
[미학의 철학]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급생 데이지의 질문에 캣시는 깜짝 놀랐다.
“아직 기간 남았잖아?”
“응. 그런데 교수님이 일찍 제출하는 사람한테는 가산점을 주신다나 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가산점이 더해지면 낙제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캣시는 귀를 쫑긋거렸다. 데이지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지난번 쪽지 시험 때문인가 봐. 그 교수님이 가산점을 주는 건 이게 처음이래.”
캣시도 들은 바가 있었다. 지난번에 있었던 쪽지 시험에서 만점자가 무려 다섯이나 나왔다고 했었나. 학생들이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교수님이 좀 기분파 같기는 했었지. 캣시가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내야 하는데?”
“제출일 하루 전날까지니까, 모레까지는 내야 해.”
모레…. 모레까지 될까?
“다른 애들 것도 모아서 제출하려고 하거든. 다른 애들도 거의 다 끝냈더라. 과제가 쉬워서 그런가 봐.”
데이지는 [미학의 철학] 강의 중에서는 이번이 가장 쉬운 편이었다고도 덧붙였다. 캣시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애들이 내가 하라고 밀어붙여서 말이야.”
데이지는 이전에도 과제를 모아서 제출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성격이라 그런지 그런 역할이 어울리기도 했다.
“하루 차이로 가산점을 못 받는 건 아까우니까, 카티올도 모레까지 나한테 줘.”
데이지가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가산점을 놓치면 진심으로 아깝다는 눈치였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끝낼 수만 있으면.
“많이 덜 했어?”
데이지의 물음에, 캣시는 어제 완성된 그림을 떠올렸다. 루카스를 두 시간 동안 얼음처럼 얼려두고 완성한 작품 치고는 많이 부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카스를 닮은 것 같지 않았다.
도저히 루카스에게 보여 줄 수 없어서, 루카스에게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걸 어떻게 내야고. [미학의 철학] 교수님이 기분파 일지는 몰라도, 작품에 대해서는 깐깐하게 보였는데. 장난 같은 결과라고 생각해서, 낙제를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낙제하면 졸업 못하는데.
“... 응.”
캣시가 궁색하게 대답했다.
“덜 쓴 거야, 덜 그린 거야?”
“그림이 아직….”
본질에 대해 논하는 부분은 끝냈다. 그림을 그리다가 도저히 안 돼서, 그거라도 썼다. 좋은 말로 포장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리기보다 쉬웠으니까.
“도와줄까? 도와주면 빨리 끝낼 수 있을 거야.”
데이지가 친절하게 물었다. 루카스보다는 데이지에게 도움을 받는 게 나을지도. 그러나 캣시는 곧 형편없는 그림을 도와주다가, 데이지가 받을 정신적 충격을 상상했다. 요정에게 악감정을 가졌다 오해하는 사태가 위험도 있었다.
“아니, 조금만 더 하면 돼.”
“그럼 빨리 끝내고, 모레까지 나한테 줘.”
데이지의 재촉에 캣시가 애처로운 한숨을 쉬었다. 모레까지는 동그라미와 직선에서 요정 느낌을 만들어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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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시와 헤어진 데이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가운 존재를 만났다.
“데이지, 과제는 챙겼어?”
“키이스! 내가 모아서 들고 가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와 준 거야?”
바로 키이스였다.
키이스는 데이지가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고명한 호로이온의 외동딸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 황가와의 약속은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쉬쉬했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황제가 한 때 호로이온 공작부인을 사모했다는 것은. 공작부인이 일찍부터 공작과 결혼하겠고 공표하지 않았다면, 공작부인이 아니라 황후가 되었을지도 몰랐다고 한다. 어쨌든 황제는 가장 아끼는 신하이자, 제국을 이끌어가는 가문의 사람을 포기했다. 대신에 그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황가와 인연을 만들어 버렸다.
그게 바로, 태어나기도 전부터 미래의 황후로 예정된 키이스 호로이온이었다. 그 호로이온의 어린 딸의 이야기가 귀부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오르내렸던가. 데이지는 툭하면 보지도 못한 호로이온의 딸과 비교하는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있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황가와 인연이 있던 사람을, 데이지가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래서 선입견도 좀 있었다.
“내가 했어야 할 일인데. 도와줘서 고마워.”
키이스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데이지는 그 미소에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말을 들으려고 키이스를 도와주는 거지.
직접 만나 본 키이스는, 선입견 속에 살던 키이스와 전혀 달랐다. 엄마 말이 정확했다. 키이스는 꽃이 민망해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꽃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향기로웠다. 키이스의 주위에는 기품과 우아함이 공존했다.
“그럼 다들 낸 거야?”
키이스가 물음에 데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못 끝낸 애들도 있었어. 모처럼 키이스가 가산점을 받을 방법을 알려줬으니까, 다 같이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애쓰고 있어.”
현명한 것으로 따지면, 도서관에서 가장 두꺼운 책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키이스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언제나 놀라웠다. 데이지도 어디 가서 사교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데, 키이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키이스가 아니었으면, 그 깐깐한 교수님에게 추가 점수를 어떻게 얻어내겠어?”
교수님이 편애하는 키이스였다. 키이스는 가산점 같은 게 없어도, 최고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키이스는 다른 사람들 모두가 좋은 점수를 받기를 원했다.
쪽지 시험을 대비하려고 함께 공부하자고 하는 것도 그랬고,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한 동급생을 위해 좋은 생각을 해낸 것도 그랬다. 편애를 뒤에 업고, 과제를 일찍 제출하고 가산점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데이지로는 상상할 수 없는 마음씀 씀이었다. 이런 사람이 제국의 황후가 되는 거구나. 외면도, 내면도 완벽한 사람이었고, 그 모든 방식이 고상했다. 데이지는 그런 키이스를 존경했다.
“다들 열심히 하는 걸 보고, 교수님이 도와주시는 거지.”
키이스가 겸손하게 웃었다.
“에이, 나도 눈치가 있는걸. 키이스가 아니었으면 그런 일이 절대 없었을걸. 애들도 다 고마워하고 있어.”
아무리 겸손하게 있어도, 모든 행동이 고귀하게만 보였다. 정말 빛이 나는 사람이라고, 데이지는 생각했다. 아카데미에 천사가 있다면 키이스 하나였다.
“나는, 정말 키이스가 이 나라의 황후가 된다고 해서 기뻐. 키이스가 아니라면, 제국에 황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진심이야.”
데이지는 키이스를 보며 항상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키이스는 데이지의 진심 어린 칭찬에 그러지 말라면서도, 당연한 말을 들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고마워. 데이지. 아직 못 끝낸 애들은 누구누구야?”
“아, 론이랑, 테일러……그리고 카티올까지, 5명이야.”
키이스는 이름을 신중하게 듣더니, 한마디 했다.
“내가 시간 날 때 도와주러 갈까 봐.”
데이지는 그러지 않아도 될 호의를 준비하는 키이스를 말렸다. 키이스는 이게 아니라도 특별과정 신청 준비로 바쁠 시기였다.
“그러지 않아도 돼. 우리끼리 잘 도와서 빨리 끝내도록 할게! 키이스는 신경 쓰지 마.”
키이스가 데이지의 만류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래 줄래? 그럼 데이지, 꼭 모두의, 카티올의 과제까지 받아줘. 부탁할게.”
데이지는 키이스의 신뢰에 꼭 부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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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를 모레까지 제출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캣시는 루카스를 찾아갔다.
아카데미 안에는 도저히 끝낼 수 없으니, 집에서도 모델이 되어줄 수 있겠냐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루카스는 기꺼이 캣시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날 오후 늦게까지 루카스는 움직이지 않는 모델 역할을 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항상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림 실력이 하루 만에 발전할 리가 없지.
그래도 낮이면 루카스를 보면서 그리고, 밤이 되면 루카스를 상상하면서 열심히 그렸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와, 방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자니 엄마와 아빠가 구경도 왔었다.
엄마는 그림을 유심히 보더니 칭찬의 말을 꺼냈다.
‘늑대가 참 사람처럼 생겼네! 우리 귀염둥이는 역시 동물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차마 늑대 갈기가 아니라,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캣시는 어렸을 때 달팽이 같은 것도 잘 그렸지. 우리 딸은 잘하는 게 왜 이렇게 많을까!’
엄마는 칭찬 아닌 칭찬에 더 어두워진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대신 아빠가 우울해하는 나를 알아차렸다. 아빠는 엄마의 칭찬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늑대… 는 아닌 것 같은데.’
아빠는 내 마음을 잘 맞추니까, 그림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약간 기대했다.
‘로비에 있는 잠자리 조각상을 그렸니?’
너무해. 눈코 입을 다 그렸는데 잠자리가 되는 건데. 내 얼굴을 본 아빠가 다시 말을 바꾸었다.
‘이 부분은 뿔처럼 보이는데, 악마를 그린 건가?’
아빠가 가리킨 부분은 악마의 뿔이 아니라 루카스의 귀였다. 잠자리에서 악마까지 나아간 게 발전일 수도 있는데, 악마를 그려 놓고 루카스라고 과제를 내면 아카데미에서 돌을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좋아. 정말.
아빠는 크게 한숨을 쉬는 나를 보고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미 크게 상심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도 그제야 추측이 틀렸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엄마가 다음 추측을 말하려는 것을 아빠가 막았다. 아빠는 더 그리다 보면 나아질 거라는 말을 하고, 재빨리 엄마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물감을 짰다. 늑대와 잠자리 그 중간쯤 되는 악마를 요정처럼 바꾸려면 시간이 모자랐다.
정말이지, 과제가 끝나기만 해 봐라. 초상화는 절대 안 그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