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_L _ 2019. 10. 11. 00:47

#


“카티올, 이게 완성작품이야?”
데이지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캣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걸로 해도 괜찮겠어?”
캣시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게 최선이야.”
데이지는 단호한 캣시의 주장에 난감한 얼굴을 했다.

“지금 내면 다시 못 받는데.”

“괜찮아.”
결과는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이게 사람인지 알아볼 정도는 됐다. 데이지의 반응만 봐도 그렇다. 적어도 이 그림이 인외생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잖아. 

캣시는 스스로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곤충이 하룻밤만에 사람이 되다니. 이 정도면 신이 인간을 만든 일에 버금가는 창조력이 아닐까. 피곤에 찌들린 캣시는 답지 않은 허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카티올, 이건….”
데이지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말했지만, 캣시는 단호했다.

“이걸로 해 줘.” 
지금 상태에서 손댄다고 더 나아질까. 더 망가질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이 그림으로 받을 수 있는 최저점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낙제는 아니야 할 텐데. 가산점도 받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캣시는 교수님의 눈을 믿었다. 전문가란 그렇다. 단편을 봐도 전체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캣시의 미묘한 그림이, 누군가의 최선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데이지는 단호한 캣시의 말에 계속 거절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긴 사람은 아카데미, 아니 제국을 통틀어도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대신 이래도 되나 싶은 얼굴로 캣시의 그림을 챙겼다. 캣시가 마지막 사람이기도 해서, 더 시간을 줄 수도 없었다. 시간을 들여 더 그리는 것보다 가산점이라도 받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데이지가 다른 아이들의 과제를 착착 정리하는 걸 보던 캣시는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바로 가?”

“응. 캣시가 마지막이거든. 왜?”

“아니, 그냥.”
그냥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란 말이지. 그림에 신경을 너무 써서 그런가? 캣시는 이유모를 이상한 느낌을 무시하기로 했다. 

데이지는 캣시에게 어쨌든 수고했다며 진심을 담은 인사를 건넸다. 캣시도 데이지에게 수고한다고 인사했다. 데이지는 그 말에 겸손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가 봐야겠다며, 데이지가 먼저 일어섰다. 캣시도 뒤따라 일어섰다. 

“어디, 가?”
데이지가 의아하게 물었다. 

“산책.”
캣시가 짧게 대답했다. 시름하던 과제도 끝났겠다, 이제 산책도 낮잠도 마음대로 하고 살아야지. 지난번에 낮잠터로 발견한 언덕에나 가 볼까. 아직도 아른데는 물감 냄새를 풀냄새로 바꾸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


캣시와 헤어진 데이지는 과제를 잔뜩 안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교수님에게 들리기 전에, 키이스가 같이 가자고 했는데. 키이스는 과제가 무겁기도 할 테니, 함께 교수님에게 가자고 했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물어볼 게 있다고 했다. 데이지는 눈치가 빨랐고, 키이스가 물어볼 게 있다는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데이지가 혼자서 일하는 게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하지만 키이스가 계속 신경을 쓴다면 함께 가는 것도 괜찮았다. 실은 괜찮은 게 아니라 좋았다. 동경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데이지는 키이스를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키이스는 특별과정을 듣는다고 하던데. 그 전까지는 특별과정은 공붓벌레들이나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특별과정에 이례적으로 지원자가 몰릴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유야 빤했다. 그리고 데이지도 그 빤한 이유로 고민 중이었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키이스가 특별과정을 듣는다고 하니, 이상하게 좋게 들린다.

데이지는 키이스와 만나기로 한 2층의 강의실 앞에 도착해서도 생각을 이어갔다. 키이스한테 한 번 물어볼까. 키이스 때문에 특별과정을 고려하게 되었다고 하는 건 조금 부담스럽나. 

그런데 키이스는 어떻게 특별과정을 듣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분명 대단한 이유가 있겠지. 제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이유 같은 걸까? 아니면, 아카데미의 특별과정 부흥을 위한 큰 그림인가?  

데이지는 캣시가 들었으면 말도 안 된다면 기겁했을 억측을 이어나갔다. 강의실 문 옆에서 루카스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면, 어딘가 어긋난 데이지의 억측은 멈추지 않았을 터였다.

“아앗!”

데이지는 루카스의 깜짝 등장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루카스는 데이지의 새된 비명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덤덤하게, 익숙하게 데이지가 진정하기까지 기다렸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프라노 톤의 환영 인사가 루카스에게는 되려 익숙했다. 

“루…루카스?”

데이지가 겨우 루카스의 이름을 토해냈다. 데일로엠의 둘째 공자였지. 
아카데미에서는 키이스 다음의 유명인사였다. 루카스는 키이스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 데이지는 멀리서 루카스를 본 적이 있었다. 확실히 멀리서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기는 했었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백금 같은 키이스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차분하다는 인상도 있었다. 아카데미의 쌍두마차라고 불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데이지는 내심 키이스만 아카데미를 대표할만하다고 생각했었다. 

데일로엠의 둘째 공자는 신분에서도, 외모에서도, 그리고 성격에서도 키이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키이스는 미래에 제국의 황후가 될 사람이고, 루카스는 경우 공작가 차남에 불과했다.

외모도 그렇다. 칙칙하고 탁한 검은 머리가 뭐 그렇게 멋지다고. 수도에서 찾기 힘든 환한 백금발의 키이스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한다. 

특히 데이지는 루카스의 성격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워낙 말이 많이 도는 인물이다 보니, 데이지는 루카스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었다. 차분하고, 평정을 잃지 않는 타고난 검사라고 했던가. 

점잖은 척하는 건 쉽다. 하지만 키이스처럼 주변을 압도하고 따르게 만들고 싶은 사람은 얼마 없다. 데이지 자신이 활발하고 사교성이 있는 편인 만큼, 더 절실하게 느끼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루카스를 만나고 보니, 이제까지의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니었나 싶었다. 

신분은 둘째 치고, 저 눈부신 외모는 뭐지? 가까이서 만난 루카스의 검은 머리는 데이지의 짧은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누가 검은 머리카락이 칙칙하다고? 부드러운 검은색은 신비롭고, 매혹적이기만 했다. 그리고 눈동자, 저 눈동자가 정녕 사람의 눈동자란 말이야? 데이지는 저렇게 오묘한 빛은 본 적이 없었다. 보고 있을수록, 보고 싶은 눈빛이었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목소리도 미쳤네. 

데이지는 루카스의 아름다운 얼굴에 걸맞은 목소리에 호흡을 멈췄다. 키이스도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면 위험하기가 맹수와도 같다. 

“아…아직 아무도 없는데요.”
루카스가 가만히 데이지를 보았다.

“제가, 키이스를 기다리는 중이라서요.”
추궁하는 눈빛도 아닌데, 데이지는 설명했다. 마치 키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데이지는 의식적으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도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려서 두통이 왔었는데. 아카데미에서 살아남으려면 숨쉬는 법 쯤은 알아둬야지. 아카데미와 정글은 엄연히 다른 곳이지만, 생존 지식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데이지가 숨쉬는 법을 기억해 냈을 때쯤, 루카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키이스를 만나기로 했습니까?”

“네. 같이 교수님한테 가기로 했는데.”
루카스가 데이지 손에 들린 두꺼운 과제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니까 과제를. 이걸 제출하려고….”
그동안 데이지는 두서없는 말을 하는 입을 원망했다. 루카스는 데이지가 과제를 같이 제출하려고 한다는 데이지를 의아하게 보았다. 
그래도 키이스는 자꾸 보니까 견딜만한데, 이 신비로운 사람은 너무 어렵다. 몸이 내 몸이 아니야. 데이지는 루카스가 과제 더미로 손을 갖다 대는 루카스를 멍하니 보았다. 

“왜, 왜?”
왜, 그러니까 왜 말을 더듬고 있는 건데. 데이지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동안, 루카스가 친절한 미소를 보여줬다. 정말 조그마한 미소였는데도, 절벽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데이지는 그 절벽이 데이지의 마음 안에 있던 루카스에 대한 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루카스는 덤덤하게 설명했다. 데이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과제는 루카스 손에 넘어가 있었다. 

“과제는 이게 전부입니까?”
루카스는 자연스럽게 과제를 확인하며 물었다.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가 다시 조용한 미소를 한 번 지었다. 한 순간 지나가는 미소였는데도, 계속 기억날 것 같다. 루카스는 키이스에 대해 말해줘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인사했다.
 
“내가, 내가 더 고마워요.”
데이지는 루카스가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할 뻔했다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루카스는 벅차오르는 표정의 인사를 모른 척해줬다. 루카스 앞에서 그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


루카스는 데이지를 뒤로하고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였다. 

노골적이지 않게 과제를 손에 넣으려면 중간에 빼돌리는 게 편하다. 키이스도 나름대로 조심은 했겠지만, 결국 루카스의 손에 캣시의 과제가 돌아왔다.  방심은 가장 중요한 순간의 직전에 일어난다. 

키이스는 루카스가 아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빼돌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캣시의 졸업에 대해서, 이번만은 미적거리는 기색을 보인 것도 효과가 있었다.

루카스는 키이스가 당근머리 황태자에게 언제쯤 풀려나올지를 가늠했다. 루카스의 부채질도 그럭저럭 먹혔다. 황태자는 키이스의 과제가 끝나는 날인 오늘에 맞춰, 아카데미 근처로 잠행을 나왔다. 

당근머리와 독대를 독이 오른 키이스가, 캣시의 과제가 제출된 걸 보고 폭발할 걸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 망나니는 주변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만큼, 좀 당해봐야 한다.

루카스가 데이지의 시선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과제를 한 장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루카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루카스를 그렸다고 하지만, 루카스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림이었다.

루카스는 카티올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몇 번이고 도와줄까-라고 하고 싶은 걸 참았다. 붓질을 한 번 하면, 한숨을 포옥 쉬는 모양이 여간 신경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못하겠으면, 그냥 도와달라고 해도 될 텐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대가 눈 앞에 뻔히 있는데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점이 어리석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에게 떨어진 과제인 만큼 혼자 끝까지 해내겠다는 게 카티올다웠다. 

그 과정에서 그도 얻은 게 없지는 않았으니까. 

솔직하게는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캣시는 루카스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루카스의 눈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그 마음의 한편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

그래서, 그래서 나온 결과가 이거란 말이지. 

루카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흑마(黑馬)의 갈기, 무소의 검은 뿔, 그리고 꿀벌의 눈까지. 괴기하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의 손에 있는 모든 과제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그림이었다. 

카티올의 눈에 루카스는 도대체 어떻게 비치고 있는 거지? 루카스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의 외모에 회의감을 느꼈다.

꿀벌처럼 커다란 눈동자는 차라리 알기 쉬웠다. 색이 푸른색이었으니까. 믿고 싶진 않지만 루카스의 눈동자를 그리려고 애쓴 것처럼 보였다. 덧칠만 몇 번을 한 건지, 눈동자 부분만 종이가 울퉁불퉁 이질적이다. 그래서 더 곤충의 눈처럼 보였다. 

눈은 그렇다 치자. 그럼 여기 말 갈기처럼 삐쭉한 건 루카스의 머리카락인가? 항상 머리를 정리하고 다니는데, 왜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그렸는지 모르겠다. 

모델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 그리고 싶은 대로 선을 그은 건가? 한 번도 한 적 없는 헤어 스타일도 넘어간다 치자. 그렇다면 이 뿔은 도대체 뭘 표현한 거지. 

정말 무소를 그린 건 아닐 테고. 루카스의 상식에서 검은 뿔이 달린 게 딱 하나 있었다. 악마? 

악마의 뿔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루카스의 인상이 왈칵 구겨졌다. 이 과제의 주제가 떠올라서 그랬다. 그림을 그리고, 그 본질에 대해서도 논하라. 그런 주제였지.

카티올이 그린 그림의 본질은 어떻게 생각해도 괴기함 그 자체였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만, 그가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기다린 결과가 이거라니.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더니, 추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저 글씨만 못 쓰는 줄 알았더니, 붓질은 더 못했다.  

이렇게 만들려고 해도 따라 할 수 없을 완성도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걸 결과물이라고 내놓은 카티올도 기가 막혔다. 용케도 이런 걸 내고 졸업을 노리는구나 싶었다. 아카데미 최고 수재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퇴학 이상을 줄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이 수준이면, 키이스가 방해공작을 피울 것도 없었겠군. 그대로 내버려 두면 자동으로 유급할 수준이니까. 냉정한 평가를 내린 루카스는 카티올의 그림을 품에 소중히 챙겼다. 

문득 루카스는 스토렘 백작 부인이 떠올랐다. 딸 자랑이 심한 스토렘 백작 부인은 키이스나 루카스 앞에서도 카티올을 자랑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언제였던가, 우리 카티올이 추상화를 아주 잘 그린다고 부산을 떨던 때가 있었지. 

루카스는 지금에서야 궁금해졌다.  

그게 과연 추상화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