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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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루카스가 물었다.
“과제.”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 마지막 리포트를 안고 있는 것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었다. 한숨이 백색 종이 한구석을 예술적으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캣시는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과제의 고충을 표현했다.
“이게?”
루카스가 캣시의 오른손에서 이어지는 무한의 동그라미를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종이 위에 찍찍 그어내려 가는 선들은 과제는커녕, 글자로도 보이지 않았다. 캣시는 울적한 얼굴로 루카스를 올려봤다. 루카스의 아름답고 반짝이는 얼굴은 언제 봐도 반질거린다.
“넌 좋겠어.”
캣시는 이런 심오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루카스가 조금 부러웠다. 같이 수업을 듣는 키이스도 부러웠다. 키이스는 망설임없이 주제를 정했으니까. 사실 같은 수업을 대부분의 학생들도 키이스와 같은 주제를 선택했다. 다른 선택을 한 소수의 학생들은 저마다의 답이 있는 것 같았다. 망설이고, 고민하는 캣시 하나인 것 같았다.
왜 잘 하지도 못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이러고 있는 거야. 한탄스럽다. 이번 과제는 꿀이라는 키이스의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꿀벌같이 부지런하고 똑똑한 키이스에게 어려운 게 뭐가 있겠어.
호시탐탐 아카데미 특별과정과 유급 사이에서 캣시를 혼란시키는 키이스의 사탕발림에 면역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은 잠깐 방심했다. 넘어간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그대로 고개를 파묻자, 루카스가 캣시를 옆으로 밀어냈다.
“무슨 과제길래.”
밀리면 밀려나고, 늘리면 늘어나는 고양이 다리처럼 캣시의 머리와 팔이 옆으로 굴러갔다. 루카스는 캣시 밑에 깔린 과제를 확인했다.
[주제 : 아카데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을 그리고, 그 본질에 대해 논하시오.]
루카스는 주제는 확인했지만, 어려운 점을 찾지는 못했다. 루카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솔직한 편이였다.
“이게 어려워?”
그 질문의 방식이 조금 재수 없는 방향이기는 했지만. 캣시는 루카스의 솔직한 질문에 볼멘소리를 냈다.
“어렵지.”
다재다능한 누군가에게는 고민이 아니겠지만, 캣시에게는 아주 큰 고민이었다. 그림도 그림대로 문제고, 주제도 주제대로 그랬다.
“다른 애들은 다 키이스나 널 그릴 걸.”
아카데미가 아니라, 일생에서 가장 인상깊은 일 중 하나가 요정을 만난 거라는 아카데미 학생도 많았다. 그도 그럴게, 지루한 수업과 과제 사이에서 그만큼 기억에 각인될 일이 뭐가 있겠어. 객관적으로도 아카데미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요정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본질에 대해 의견차이가 있겠지.
캣시는 캣시가 아는 그 누구보다 성질이 사납고, 못된 요정을 떠올렸다.
요정이 인상적이라는 건 동의한다. 하지만 그 본질을 좋게 말하는 건 못하겠다. 키이스나 루카스를 들어, 친절하고 상냥하기가 성인(聖人)과 같다고 적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법이라고, [양치기 소년]이 알려줬다. 캣시 개인적으로는 동물을 동물답지 않게 그린 이야기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양치기 소년]에 나오는 늑대와 양 그림이 몹시 사실적이라서 좋아했다.
어쨌든, 아끼는 책 속의 교훈처럼 너무 큰 거짓말을 하고 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괜한 이목을 살까 두려웠다. 평화로운 아카데미 생활의 끝에, 요정들을 추종하는 무리의 원한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진실은 분명 중요하지만, 모두가 진실을 알 필요는 없다고, 캣시는 생각하고 있었다.
캣시는 현재의 아카데미 생활에 아주 만족했다.
지금이 마음에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캣시와 요정에 대해 모른다는 점이었다. 캣시는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요정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요정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요정들은 캣시와 과도하게 친한 척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말을 걸거나 이야기는 했지만, 다른 학생들보다 친분이 있는 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한 거리감. 그게 가장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애초에 관심있는 과목도 다르다 보니, 같은 강의를 듣는 일도 적었다. 루카스는 검술과 행정 쪽을, 키이스는 역사와 경상 분야를 선택했다. 둘에게 잘 어울리는 과목이었다. 종종 교양수업이나, 여타 수업에서 만날 일이 있었지만, 지난 2년 동안 먼 지인처럼 보이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요정들과 캣시가 아카데미 안에서 말도 섞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캣시가 혼자 있을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불쑥 요정들이 나타났다. 이것저것 잔소리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떠들다가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홀연히 사라졌다. 그런 요정들의 기행에 캣시는 혼자 생각했다. 정말 요정이 따로 없네.
또한, 캣시는 빈 강의실에서 과제를 하는 걸 좋아했다. 제국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아카데미 건물은 채광도 좋아했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강의실이 최적의 낮잠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학하고 한 달. 다른 학생들이 신학기의 설렘과 현실의 치열함에 헐떡일 때, 캣시는 어떤 강의실이 가장 잠자기 좋은지 파악했다.
이 곳, 별관 3층 구석의 작은 강의실도 그랬다. 누군가에게는 강의실이겠지만, 캣시에게는 달콤한 낮잠터 중 하나였다. 아카데미 특유의 공기를 맡으며 낮잠을 자면, 꿀같이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자세가 불편해도, 잠이 잘 오는 걸 보면 신기했다. 어쩌면 강의실에 수면향이 피울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을 만들어볼 정도로.
그리고, 낮잠은 커녕 밤잠도 채우기 버거운 요정들도 이 곳에 자주 들렸다. 궁시렁궁시렁 거리며.
요정들은 캣시가 낮잠을 자는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집에 불이 나도 잠이나 자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캣시였으니까. 요정들이 싫어하는 것은 캣시의 낮잠터였다. 요정들은 캣시가 끊임없이 발굴하는 낮잠 자기 좋은 공간에 불만이 있었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캣시는 잠자기 좋은 곳은 어디든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고, 적당히 잠잘 수 있는 틈을 어디서든 찾아냈다. 요정들은 매일 달라지는 캣시의 낮잠터를 찾아야, 캣시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은 어렵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캣시를 찾는 일은 어려워졌다.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는 캣시의 낮잠 명소 리스트 때문이었다. 숨바꼭질이 재미있는 것도 한두 번이다.
결국 요정들끼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의견차이가 생겼다. 사실, 두 요정은 아카데미에 캣시가 입학한 이후로 많은 의견 차이가 있었다. 캣시도 신경 쓰지 않는, 캣시의 미래를 가장 열심히 고민하는 게 바로 요정들이었다.
키이스는 캣시를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 아래, 캣시를 옆에 두고 알리고 싶어했다. 지금 숨바꼭질이 가능한 건, 다른 사람들이 캣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루카스는, 아카데미라는 특수환경에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은, 캣시와 함께 하는 시간만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요정들은 서로를 멍청한 허세꾼과 음흉한 미친놈이라 삿대질했다.
요정들이 서로를 욕하든 말든, 아무것도 모르는 캣시는 적당한 거리의 인간관계, 꿀같은 낮잠터, 흥미로운 과목. 무려 옵션이 3개나 붙은 아카데미에서 아주 쾌적하게 지냈다. 아카데미의 생활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일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캣시가 관심을 가지는 과목의 심화과정이 없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럼 나로 해.”
상념에 빠진 캣시에게 루카스가 강요했다. 요정들을 주제로 하면 어렵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루카스가 이해를 못한 것 같았다. 캣시는 루카스의 광나는 얼굴을 한 번 올려보고는 고개를 도렸다.
“싫어.”
책상에 딱 붙여둔 머리가 돌리자, 루카스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카스 얼굴을 보면, 없던 힘이 더 빠진다.
과제는 주제도 주제대로 문제가 많았지만, 또다른 문제가 있었다.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쩐지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담당이라는 걸 들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미학의 철학]이라고 적혀있어서, 철학을 가르치는 줄 알았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과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림을 그려야하는 걸 듣자마자 그냥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키이스의 옆에 있던 후배에게 슬쩍 들었는데, 교수님이 키이스의 엄청난 팬이라고 했다. 키이스의 아름다움과, 키이스의 미담집을 만든다고 과제를 낸 게 아니겠냐며, 크게 떠들었다.
교수님이 사심으로 과제를 내면 어떡해. 소문의 진실이라면, 일종의 차별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 생각은 캣시와 많이 다른 것 같았다. 그 말을 떠든 후배도 그랬지만, 대부분은 교수님이 똑똑하다, 내가 교수라도 그랬겠다, 이번 과제에 참여하게 되어 기쁘다… 같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말을 했다.
키이스가 그 수업을 듣는다고 했던 때부터, 이미 그 수업에는 키이스를 쫓아다니는 동급생과 후배로 가득찰 거란 걸 알았어야 하는데. 과목이 꿀이라서 사람이 많이 꼬이는 게 아니었다.
“왜 싫은데.”
루카스가 몸을 낮추고, 바다빛바다 빛 눈동자를 캣시와 높이를 맞췄다. 루카스의 무심한 얼굴을 보던 캣시는 한숨을 쉬었다. 가까이서 보는 루카스의 바닷빛 눈동자는 더 깊게 보였다.
“왜 싫어?”
루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쟤는 진짜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걸까. 캣시는 루카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카스도 반대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말로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맞추고 기다린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계속 이러고 있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네.
“잘생긴 게 싫어.”
루카스는 잘생겼다기 보다, 아름다운 요정이지만, 의미만 통하면 된다. 실은 캣시도 요정을 그리기를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기일이 코앞이라, 뭐라도 그렸어야 하니까. 본질에 대한 감상은 둘째 치고, 그림을 제출해야 하니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가 노트를 채우기 전까지는 캣시는 노력했다.
결과가 노력을 담지 못해서 그렇지. 더러운 쓰레기는 지저분하게 색칠해도 넘어갈 수 있지만, 아름다운 무지개는 한 번이라도 색을 잘못쓰면눈쌀을 찌푸리게 된다. 예쁜 것들은 그리기가 어렵다.
목표가 요정인데, 결과물은 괴생물만 나오고 말이지. 인간 이외의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적어도 아카데미에 있는 수많은 요정 추종자에게 돌을 맞지 않으려면 아니어야 했다.
루카스는 캣시의 답에 멈칫했다가, 말했다.
“그리다보면 나아지겠지.”
루카스는 캣시의 그림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캣시의 솜씨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캣시도 루카스의 뛰어난 추리에 잠시 멈칫했다. 루카스에게 그림을 보여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내가 그림을 못 그릴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지?
“모델해줄게.”
루카스가 은근히 캣시를 설득했다.
“보고 그리면 쉬울 거야.”
캣시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어렵게 생긴 것 같은 사람 1번의 도움이 안 되는 설득에 다시 한숨을 쉬었다.